[난청일기_20231024] 꾀

2023. 10. 25. 11:12일상_Life/난청일기

꾀가 난다.

아직 오른쪽 귀에 답답함과 이명이 남아있다. 하지만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진 상태이다. 귀가 달라진 것처럼 내 마음가짐도 변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날을 생각해보면 마음도 깜깜했다. 소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두려움에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지금도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고용량 스테로이드의 영향때문일 것이다. 마음은 편하다. 글을 쓰고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는다. 수영을 제외하면 운동도 실컷 즐기고 있다.

꾀는 일주일에 세번 서울을 왕복해야 하는 치료에서 올라왔다. 기껏해야 5번 왕복, 총 10번의 고속버스를 탔다.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오르내리는 세종, 서울 왕복길에서 비장하고 간절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서울에 도착하여 주사를 맞고 내려오는 길이 멀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고속버스가 집 앞에 있는 충남대학교병원을 지나면서 병원 응급실로 들어가는 길을 쳐다보았다.

'저기서 그냥 진득하게 치료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걸어서 15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인데...'

'굳이 서울까지 가서 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내 증상을 주변에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큰 병은 무조건 서울로 가야되."

"5대 병원이 괜히 5대 병원이 아니야. 의사도 장비도 달라."

"사람들이 괜히 서울로 가는 게 아니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로 가기를 추천했다. 그것도 꼭 5대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아내와 나는 돌발성난청의 치료 방법은 수술이 아닌 이상은 첫 번째가 고함량스테로이드제이고 두 번째가 고막주사, 세 번째가 고압산소치료나 한의원치료라는 것 알고 있었다. 유튜브와 인터넷 검색의 도움이었다. 그 중에서도 실제 대학병원 의사들이 출연하는 유튜브는 신뢰할 만 했다.

결론은 서울로 가도 치료 방법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왜 병가까지 내면서 서울로 다니는 것인가? 나에겐 그럴만한 다양한 이유와 핑계가 있다. 내가 처음으로 방문한 지역 대학병원 의사선생님의 태도가 나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나중에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의사선생님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첫 진료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에게 던진 그 선생님의 말은 나와 아내를 당황스럽게 했다. 

"원인은 알 수 없어요. 감기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약 드시고 휴식하세요. 청력이 돌아올 수도 있고 안 돌아올 수도 있어요."

마치, 윗동네 사시는 나이 많은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리를 듣고

"나이 드시면 다 그렇더라..."

라고 무표정하게 마시던 커피를 홀짝거리는 아줌마를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할머니가 엉덩이뼈에 골절이 생겨서 오랫동안 입원해야 하는 것과 평생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문제에 있어서 사람에게 신뢰를 주려면 우선 상대방이 어떤 상황이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무리 그 문제에 있어서 전문가라고 해도 그 사람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답을 얘기한 들 설득할 수 없다. 지역 대학병원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그 의사는 정답을 말했을 것이다. 내가 그 정답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던 대답은 뭐였을까?


그렇게 시작된 서울 원정 치료에서 만난 의사선생님은 다행이 첫 진료부터 나에게 신뢰를 주었다. 어떤 말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된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냉랭하던 대학병원의 의사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첫 진료를 시작한 날의 내 감정을 기억하면 지금 꾀를 부리는 건 사치이다.

감사하며 살자.